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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여기에서의 과정중심적 미술 (2014)
오인환 / 작가
이병수의 “102곳의 희망을 찾아서”와 이양정아의 “300/20 프로젝트”는 ‘찾기’를 실천하는 과정중심적인 작업이다. 아울러 이러한 찾기를 실천하는 과정중심적인 방식은 이들 작업들과 나의 몇몇 작업들과의 연결지점이기도 하다. 나는 “당신을 찾습니다” 연작에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흔한 이름을 가진 사람들을 찾기 위해 도시를 여행했고, 뉴욕에서는 광고를 통해 유명한 예술가의 이름을 가진 진짜들을 찾기도 했다. 나의 전작의 경험이 이병수의 “102곳의 희망을 찾아서”와 이양정아의 “300/20 프로젝트”에 자연스레 주목하게 하였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두 젊은 작가들이 과정중심적인 미술의 실천적 의미를 유지하면서 자신만의 차별화된 방식과 주제를 만들어가는 것을 목격하였다.
퍼포먼스, 개념미술, 참여미술 등 70년대 전후 등장한 현대미술의 방법론들은 결과로서의 작품중심의 미술, 상품 미학, 제도권 미술에 대한 비판적인 대안으로 과정중심적인 작업을 실행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이러한 미술의 방법론들이 보편화되면서 그 비판적 기능은 약화된 채 형식만이 차용되면서 형식화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다시 말해 형식으로서의 과정중심적인 미술은 더 이상 비판적인 미술의 전유물이 아니며 상업적이고 형식화된 미술에서도 빈번하게 목격되고 있으며 탈비판적인 미술에 포섭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포함해서 이러한 미술에 가담하고 있는 모든 작가들이 기억해야 하는 것은 과정중심적인 작업의 정당성이 과거의 미술 실천에 의해 자동적으로 부여될 수 없으며, ‘오늘, 여기’라는 동시대의 문맥에서 그 역할의 의미들을 재발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병수와 이양정아의 작업은 과정중심적인 작업이 ‘지금, 여기’의 문맥에서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사례들로 보인다. 70년대에 과정중심적인 미술을 실천했던 실험적인 미술가들이 결과 중심의 미술에 대응하기 위해 시간의 흐름이라는 과정 자체에 집중하고 극대화하고자 했다면 오늘날의 다수의 미술가들은 과정을 통해 미술의 실천과 문화비판적인 역할을 상호 연결시키고자 한다.
과정중심적인 작업들은 작가들이 만든 개별적인 진행규칙들에 의해서 진행된다. 이러한 진행규칙은 구체적인 작업의 진행방식을 규정하는 동시에 곧 그 작업의 목적과 의도를 드러내는 지점이기도 하다. 다만 사전에 설정된 진행방식 자체가 최종적인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며 진행규칙들이 어떻게 수행되느냐에 의해 작업의 최종적인 의미들이 규정된다는 점에서 수행적이며 과정중심적이다.
‘찾기’는 이양정아와 이병수가 선택한 보다 구체화된 진행방식이며 ‘무엇’을 ‘어떻게’라는 진행규칙을 수반한다. 찾기는 일반적으로 '무엇'이란 대상을 전제로 하지만 과정중심적인 미술작업에서는 ‘어떻게’라는 찾기의 방식이 ‘무엇’이라는 찾기의 대상에 종속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찾는 대상이 무엇인가는 프로젝트의 내용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지만 작업의 최종 목표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는 '어떻게'가 과정중심적인 작업의 진행규칙의 주요 내용이다. 이러한 점에서 결과를 지향하는 찾기 작업들과 ‘어떻게’를 지향하는 과정중심적인 작업으로서 이병수와 이양정아의 프로젝트는 구분된다. 여타 과정중심적인 작업에서처럼 두 작가의 작품에 대한 이해의 출발점은 각 작가들이 설정한 진행규칙과 그것의 수행 과정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병수와 이양정아는 찾기라는 과정중심적인 방식을 공유하지만 그 프로젝트의 진행방식과 찾기의 대상에서는 매우 대조적이다. 일례로 이병수가 ‘희망’이라는 추상적인 대상을 선정하고 있는 반면 이양정아는 구체적인 액수로 구입이 가능한 부동산 ‘매물’을 찾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먼저 이병수는 “102곳의 희망을 찾아서”를 위해 네이게이터를 부착한 자신의 자전거를 이용한다. 네이게이터의 목적지 검색에 ‘희망’이란 단어를 입력하고 얻어진 결과들, 즉 구로구 고척1동의 <희망약국>, 강동구 길동의 <희망수퍼>, 광진구 자양2동의 <희망연립> 등 서울의 102곳의 장소들을 작가가 네비게이터의 안내를 따라 차례로 방문하는 13일 동안의 자전거 여행을 진행한다. 여기서 중요한 진행규칙은 네비게이터라는 도구를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네비게이터를 이용하여 ‘희망’이라는 추상적이고 다의적인 언어정보를 처리하여 현존하는 102개의 여행 목적지(대부분 상점들)를 자동 산출해낸다. 즉 네이게이터라는 장비는 작가가 자신의 판단을 제한하고 제시된 목표 지점을 방문하는 노동 혹은 행위에만 집중하도록 조건화하는 역할을 한다.
이병수의 프로젝트가 희망의 의미를 찾는 언어유희로 설명될 때 그것은 소시민적 낭만주의쯤으로 전락한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의 희망 찾기는 ‘노동’이라는 작가의 신체적 개입을 통해 언어유희의 관념성을 벗어나고 있다. 네이게이터가 자동적으로 지정한 102곳의 장소들은 작가와 어떤 관계도 없는 우연적이고 임의적인 목적지라는 점에서 기표적이다. 이러한 비어있는 기표를 채우는 것이 작가의 역할인데 이병수는 자전거를 타고 목적지를 방문하는 신체적인 경험들로 이를 수행한다. 다시 말해 네비게이터가 제시한 임의의 목적지들은 그가 직접 방문함으로써 작가가 방문한 102곳의 장소들이란 의미가 획득됨과 동시에 작가의 개인적 방문은 102곳의 장소들의 사회적 실존을 증명하고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이들 일상의 장소들을 관객들에게 소개하는 가이드의 역할을 한다. 희망이란 추상적인 정보가 작가의 노동집약적인 개입으로 현존하는 일상의 장소들로 번역되는 것이다. 작가의 경험에 의하면 잘못된 정보가 원인일 수 도 있고 혹은 작가의 부주의가 원일일 수도 있겠지만 네비게이터가 지시했던 ‘희망’의 장소를 발견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목표장소의 발견 유무와 상관없이 자신의 모든 여행의 과정을 기록하는 이병수의 방식은 그의 프로젝트가 과정 의존적임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관객들은 희망이 어디에 있는지 보다는 고단한 노동을 반복하면서 여행을 지속하는 ‘작가의 행위’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묻게 된다. 아마도 그것은 희망이란 찾아질 수 없는 관념적 현실임을 폭로하거나, 낭만적인 헛수고를 통해 희망을 꿈꿔야 하는 현실에 대한 연민을 자아내는 것으로도 보일 수 있겠지만 작가가 실천했던 노동의 고단한 현실을 기억한다면 그러한 정서적 해석과는 거리를 둘 수 있게 된다.
이병수의 노동은 서울에서 쉽게 목격되는 다양한 형태의 반복적인 노동의 유형들을 동시적으로 연상시킨다. 목적지를 스스로 결정하지 않고 주어진 목적지를 향한 여행을 지속한다는 점에서는 음식 배달원이나 택배기사의 노동과 연결되지만 비경제적인 유형의 자발적인 노동이라는 점에서는 자전거동호회 회원의 활동에 가깝다. 하지만 이병수의 작업은 하나의 직업을 재현하기 보다는 그 노동 방식들의 구조들을 교차 편집시키면서 반복과 반복되지 않는, 자의적 혹은 타의적, 경제적 혹은 비경제적 등의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상적 행위/노동들의 구조적인 유사성을 재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특정한 노동의 유형 보다는 일상의 노동들은 어떤 형태이든 ‘진행 중’ 일 때만 기능하고 의미화되는 노동의 수행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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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정아와 이병수의 작업에서 알 수 있듯이 오늘날의 과정중심적인 미술에서 과정은 일상의 다양한 행동유형들을 끌어들이는 통로가 된다. 즉 작가들이 배달을 하거나, 음식을 만들거나, 이발을 하는 등 일상의 과정과 미술작업의 과정을 중첩시킨다. 여기서 미술과 일상의 행위의 중첩은 “일상과 예술의 일치”라는 과거의 미술가들의 선언을 실천하는 것에 정체되어 있지 않다. 오늘날 의식있는 미술가들이 일상적인 역할을 차용하는 것은 단순히 일상을 재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상의 행위들과 연결되는 가부장제의 모순, 젠더에 따른 노동의 위계, 소수자의 차별 등 일상 속에 내재화 되어있는 문화적 쟁점들을 발현하기 위해서이다.
모더니즘 미술 체계에서는 형식주의 미술이든 비판적 미술이든 미술공간과 일상을 이분법적으로 분류하여 일상을 미술의 영역의 반대편에 위치한 ‘하나의 영역’이란 가정을 일반화하는 문제점을 낳았다. 반면 오늘날의 비판적인 미술은 일상이란 하나의 중립적인 삶의 영역이 아니며 지배적인 가치에 의해 위계적으로 구조화된 복합공간이라는 새로운 인식을 전제로 한다. 타자의 미학은 일상을 지배하는 지배적인 가치 체계가 정체성에 의해 개인들을 분류하고 지배적인 가치에 부합하지 않는 개인들을 타자화하고 그들의 삶의 영역을 비가시화하는 것을 발견한다. 다시 말해 일상은 단일한 영역이 아니며 다양한 정체성의 영역이 구분 및 공존한다. 다만 지금의 현실은 이러한 다양한 정체성의 영역들이 위계적으로 구조화되거나 보편성이라는 하나의 체계로 규범화하고 있다. 일상을 하나의 영역으로 인식하는 것은 주류의 문화체계가 내재화된 결과일 것이다. 일상의 보편성을 문제시하는 미술가들에게 우선적인 과제는 보편화될 수 없는 근거로 자신의 정체성을 전면에 드러내고 차별화된 정체성의 관점에서 일상의 다원성을 노출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여성, 게이, 이민자, 유색인종 등 타자의 미술이 문화적 발언을 위해 자신들의 정체성에 주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편 한국 문화에서는 개인을 사회의 한 멤버 그리고 가족의 한 구성원 이상으로 ‘개인화’하는 것을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한다. 다시 서술하면 개인의 재현은 지배적 사회 체계나 가부장 제도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만 실현되며 지배적 사회 체계나 가부장 제도에 부합되지 않는 개인들의 정체성과 삶의 방식은 거부된다. 이러한 현실은 거대담론 안에 자신의 관점 또는 입장이 포함되어 있다고 믿게 만들며, 차별화된 개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은 비-사회적인 것으로 설정한다. 이것이 왜 한국의 미술 현실에서 작품은 작가의 분신이라는 형식주의의 명제와 거대담론을 통해 개별 미술의 정당성이 확보될 수 있다는 실천적 미술의 명제가 기묘하게 협업하면서 미술작업에서 개인의 정체성을 전면화하는 것이 부재하는가에 대한 나의 설명이다. 그러므로 한국적 문맥에서 일상은 균일하거나 단일한 것이 아닌, 다양하고 이질적인 영역들의 종합으로 재발견되어야 하고, 이러한 발견은 자발적인 발견자로서 작가 개인의 차별성을 구체화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이병수, 이양정아, 두 작가 모두가 채택하고 있는 ‘찾기’의 방식은 찾기를 진행하는 주체로서 작가 개인의 개입을 분명히 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즉 두 작가가 설정한 찾기의 방식은 ‘무엇’이라는 대상 보다는 찾는 행위의 진행자로서 자신들을 강조하는 방식이다. 두 작가에게 ‘찾기’의 과정은 목표지향적인 것이 아니고 보편적인 대상 및 범위를 작가의 차별화된 경험과 영역으로 개인화하는 과정이다. 이병수에게 네비게이터의 사용은 우연성을 끌어들임으로써 희망이란 단어 혹은 선정된 장소들에 연결될 수 있는 사회문화적인 의미들의 작동을 약화시킨다. 그 약화된 상태는 작가의 개입을 통한 재해석의 과정이 허락되는 지점이 되는 것이다. ‘재해석하기’는 기표에서 기의를 분리하는 전단계를 요구한다는 기호학의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일상의 재의미화는 기존의 가치, 의미, 판단을 약화시키는 능동적인 작가의 개입이 선행될 때 가능한 것이다. 이병수가 ‘희망’이란 단어를 네이게이터를 통해 우연적으로 산출하는 것은 의미가 채워지길 기다리는 비어있는 기표들을 산출하여 자신이 개입할 공간을 마련하는 방식으로 해석된다. 이병수가 자전거 여행이라는 신체적 경험을 통해 희망이란 단어에서 유추되는 의미의 거대 범위를 개인의 경험적인 범위로 축소하고 방문한 장소들의 일상성을 재발견하는 과정으로서 개인적인 활동과 사회적인 활동을 상호관계를 다룬다면, 이양정아는 부동산 매물이라는 보편적인(개인적이지 않은) 정보들을 ‘300만원’, ‘20만원’과 같은 개인적인 기준으로 재처리하는 방식을 통해 개인적 정보와 사회적 정보 간의 관계 만들기에 성공한다. 이렇게 자신의 경제적 조건을 살고 싶은 집의 면적으로 환산하는 방식은 그녀만의 미술 생산방식임과 동시에 ‘300만원’, ‘20만원’이라는 경제 지표가 개인의 삶의 경제적 고단함으로 읽히고 통속화되는 대신에 경제적 현실을 개인적인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차별화된 기준이 된다.
이병수와 이양정아는 초점을 맞추는 진행 단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작가가 각각의 프로젝트에서 사회문화적인 정보, 단어, 기준들을 개인적인 개입을 통해 재해석하는 과정은 차별화된 개인으로서 작가를 드러내면서 보편화된 일상을 차별적으로 재해석하는 사회문화적 발언으로 해석된다. 이양정아의 개인적 경제지표와 재처리한 결과들은 그녀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사회의 위계화된 경제적 현실을 드러낸다. 이양정아가 만든 자신만의 매물정보를 시각화한 서울의 지도와 이들 정보를 물질화한 콘크리트 블록의 구성 그리고 이병수가 자신의 자전거 여행을 종합 정리하여 만든 소책자는 차별화된 개인의 관점 혹은 경험에서 작성한 또 다른 종류의 서울의 사회문화적 풍경으로 보인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과정중심적인 작업을 포함한 다수의 실험적인 미술 방법론들이 오늘날 일반화되면서 그 비판적인 역할이 약화되는 문제가 있다. 물질 숭배를 거부하는 방식인 레디메이드는 데미안 허스트 Damien Hirst를 통해 더욱더 강력한 물신숭배의 대상이 되었고, 바네사 비크로프트 Vanessa Beecroft의 퍼포먼스에서 여성의 신체는 적극적인 눈요기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사례들은 실험적인 방법론의 섣부른 폐기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며, 비판적인 미술의 실천성은 방법론 자체라기 보다는 그러한 방법론과 조응하는 작동의 방식 및 비판적 태도와의 결합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진단을 하게 한다. 데미언 허스트는 네오아방가르드식의 실험적인 방법론을 차용하고 있지만 그에게 비판적인 문화의식과 태도가 결여되어 있다. 그리고 비판적인 문화의식과 태도란 각각의 시대적, 문화적 문맥에 따라 새로운 미술의 비판적인 역할을 발견하고 이에 조응하도록 방법론을 재발견하는 수행적인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오늘날의 긍정적인 미술의 사례들은 ‘오늘, 여기’의 문맥에서 ‘비판적인 문화발언’이라는 과정중심적인 미술의 새로운 역할을 발견하고 실천하고 있을 보여준다. 끝으로 이병수와 이양정아의 앞으로의 작업들이 문화비판의 수행적인 작업에 지속적으로 동참하길 기대해 본다. |